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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인간은 그늘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쓴 글

2024.08.29

“서로 연결된 세상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

세상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청소부다. 그의 하루는 철저한 루틴에 따라 운영된다. 늘 같은 속도와 솜씨로 이불을 개고, 면도를 하고, 화초에 물을 주고, 잔돈으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고는 오래된 팝을 들으며 일터로 나선다.

철저하게 루틴을 지키려는 그의 모습은 강박적이고 방어적이다. 그는 곁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남이 넘보기 힘든 철옹성을 쌓아올리는 그의 시도가 일견 처연하고 처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세계는 다른 세계와 부딪히고 교차하며 연결된다. 그러나 히라야마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결코 곁을 내어주지 않으려 애쓴다. 아마 다른 세계와 부딪히며 상처받고 다친 경험, 더불어 다른 세계에 상처를 준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히라야마의 철옹성에도 균열은 생긴다.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이 그 시작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 타카시와 그의 여자친구로 인해 루틴이 완전히 망가지기도 하고, 가출해 찾아온 조카에게 방을 내어주고 쪽방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일을 그만 두어버린 탓에 한참 늦은 시간까지 초과근무를 하고는 화를 버럭 내기도 한다. 늘 들르던 단골 술집의 흠모하던 여자 사장이 낯선 남자와 포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못본 척 뒤돌아서기도 한다. 그렇게 늘 그대로일 것 같은 그리고 그대로였으면 했던 많은 것들은 시간과 상황이 변함에 따라 덩달아 변하고 흘러간다.

“그림자가 겹치면 색이 더 진해질까요.”

단골 술집의 여자 사장이 낯선 남자와 포옹하는 장면을 목격한 히라야마는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강가로 향한다. 홀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히라야마에게 다가온 한 남자. 그는 히라야마가 단골 술집에서 목격한 낯선 남자이자, 여자 사장과 7년 전에 이혼한 전 남편이었다. 그림자끼리 겹치면 색이 더 진해질까 궁금했다는 그의 질문, 그리고 더 진하지 않겠냐며 직접 확인해보자는 히라야마의 화답은 두 중년의 그림자 밟기 놀이로 이어진다.

히라야마는 그림자다. 그는 그림자를 쫓고, 그림자 꿈을 꾸며,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사람들 눈앞에 있지만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설령 띈다 한들 얼른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그림자는 어두움이다. 히라야마가 그만의 철옹성을 견고히 쌓고 다른 세상과의 연결을 피해온 건, 스스로의 어두움을 다른 사람들의 어두움과 겹쳐가며 더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을테다.

정갈한 삶의 루틴, 그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집요하고 꼼꼼한 장인 정신, 고아한 독서와 음악 취향은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단단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히라야마의 성벽이다. 그리고 그 성벽 뒤에는 -해맑은 동료 청소부 타카시 같은 사람이 결코 상상하기 힘든-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 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낯선 남자와의 그림자 겹치기가 경쾌한 그림자 밟기 놀이로 이어지는 순간, 두 사람의 겹쳐진 그림자가 더 어두워졌는지, 똑같은지, 또는 더 밝아졌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지.”

매일 점심 시간이면 필름 카메라를 들고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기록하는 것이 낙인 히라야마. 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설령 같은 장소에 앉아 같은 나뭇잎들을 찍더라도, 매일의 햇살과 바람이 늘 다른 그림자와 빛의 자욱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체가 새롭고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빛의 흔적은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영화는 니나 시몬의 노래 ’Feeling Good‘이 흐르는 속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행복함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히라야마의 얼굴을 담으며 끝난다. 이제 히라야마의 하루는 그동안의 하루와는 또 다르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누구나 품고 있을 각자의 그림자를 살펴보기도 하고, 또 서로의 그림자를 꺼내어 겹쳐보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 모양들이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품고 있음을 알아나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