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Writings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해진다

알랭 드 보통의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쓴 글

2025.03.09

‘하트 시그널’과 ‘환승연애’, ‘솔로지옥’과 같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빠져있다. 작년부터는 ‘나는 솔로’까지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남의 연애가 뭐 그리 재밌냐고 하지만, 남들 썸 구경 만큼 강력한 길티 플레져가 또 있을까 싶은거다(…) 삶의 어떤 면모가 농축된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단 며칠만에 사랑에 빠진다. 마음을 다 전하지 못하기도 하고, 전했음에도 완전히 가닿지 않기도 하며, 때론 타인과의 경쟁 아닌 경쟁에서 미끄러진다. 마음과 마음은 오가기도, 또 엇갈리기도 한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해진다. 천국도에 다녀온 시안을 기다리며 꽃을 꺾어다 반지를 만들어 전하는 태오처럼, 자존심 백날 세워봐라며 다투고 방을 박차고 나서는 희두와 나연처럼, 미안해 한 마디만 했으면 환승연애 이딴 거 안 나왔을거라 말하는 -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쉽사리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주원과 서경처럼. (모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면들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냥 귀엽기만 한 마음과 유치한 다툼들. 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진지했을까 생각하면 남의 일같지가 않다. 다들 그런 장면들을 만들고 또 겪어오지 않았던가.

우리의 단점과 결핍들은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영혼의 짝으로 여기게 만든다. 하지만 그 단점과 결핍들은 동시에 파국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결말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고, 또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사랑, 결혼 그리고 그 이후의 현실적인 일상을 그리며, 사랑에 대한 기존의 낭만적인 관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소설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사랑, 결혼, 다툼, 그리고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엿보다보면, 사랑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상대의 결핍을 보듬을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수많은 예술작품이 사랑을 그저 낭만적으로만 묘사해온 탓에, 우연히 운명의 짝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결말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아마, 이 자연스럽고 당연해야 할 결말에 이르는 것이 너무나 힘겨워보여서이기도 할테다. 알랭 드 보통은 그런 낭만주의적 결혼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의 ‘낭만주의’는 긍정적인 레토릭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결혼이 가져다줄 현실과 불확실성을 직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다는 것.

저자는 결혼을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이라고 묘사한다. 일견 시니컬한 표현이지만, 실은 나 자신과 상대방의 불완전함과 그로부터 기인한 고통을 견디기로 결정하고 상대방을 일생동안 사랑하겠다는 용기있는 다짐에 가깝다.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빗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이 표현을 곱씹으며, 사랑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우리보다 어리게 여기는 것을 윗사람 행세로 보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 -그리고 용서해주는- 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결국 사랑은 시작부터 끝까지 어린아이들이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 그 자체이지 싶다. 내게도 네게도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숨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른의 모습 뒤에 숨은 어린아이마저 다정하게 보듬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실은 그럴 수 있다는 것마저 내게만 허락된 특권임을 즐기며.

그러니 내 마음 속에 들어앉은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 상대방의 때론 비이성적이고 심술궂고 어린애 같은 면에도 다정함을 보일 것을 다짐해본다. 그리고 때론 이 다짐이 실패하거나 시련이 찾아올지라도 기꺼이 함께 극복할 수 있을거라는 낙관적인 현실주의를 품겠다는 생각도 함께.